바리전쟁 감상 감상 상자
2010.07.30 17:16 Edit
#미리니름이 될만한 곳은 드래그를 필요하게끔 가려놓았으나, 의도치 않은 일부 미리니름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바리전쟁
글:진산
그림:맛치
D&C의 장르 엔트테이먼트 브랜드인 이타카에서 한국 괴담 정통 프로젝트, 줄여 신 괴담문학의 첫 발족을 진산 작가의 바리전쟁으로 끊었다. 이타카는 한국에서 쥬브나일 계통의 소설 브랜드로, 라이트 노벨을 비롯한 여타 장르문학과는 달리 문학 성격을 가미한 장르문학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지는 중이다.
신 과담 문학이라는 이름하에 바리와 무당의 이야기를 괴담이라는 이름하에 풀어낸 다는데 심히 이끌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친숙함과 동시에 낯설음을 간직하고 왜곡되어 온 무당에 관한 이야기.
자체 비쥬얼 영상 광고와 더불어 신 괴담문학을 자처한 첫 소설이기에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주목하고 있다.
"이게와 저게, 두 세상 하나로 통허게 하소사."
'이 세상에 귀신은 없다. 외계인도 마녀도 없다. 저승세계 따위 농담일 뿐이다.'
'남자 스컬리'로 통하는 대학원생 진영.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주워온 '여동생' 수영을 괴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한다. 여동생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망친 지 십 년.
어느 날, 아버지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쓰러졌다는 전화와 함께 잊고 있던 악몽이 되살아 나는데-
비쥬얼 영상 광고와 괴담 문학이라는 자극 탓에 자칫 호러/미스터리 장르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나,
글쓴이가 읽어 본 바리전쟁은 일반 장르문학이지 괴담+문학은 아니다.
이전에 호러/미스터리=괴담으로 동일시하는 건 무리수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괴담이란 쉬이 풀어 괴이한 이야기로, 즉 일상-현실적으로 불가능-불해한 사건에 화자가 휘말려 공포에 시달리는 이야기를 보통 지칭한다. 도시전설, 학원전설 등이 괴담의 하분류로 구분된다.
그렇기에 수영의 존재가 공포적 색체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나, 구성으로 살펴 볼 때에도 통속적인 괴담을 자처하는 건 힘들다.
구성 자체에서 주인공은 이미 '괴담'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이는 주인공이 엄격히 현실(이하 소설속 용어로 차안으로 통일.)에 발을 딛고 비현실을 겪는 '괴담'과는 입장 자체가 현저히 다른 까닭이다.
구성을 잠시 살펴보자면,(드래그 요망)
1. 아버지가 사흘 째 잠에서 깨질 않는다.
2. 나의 본가 방문을 계기로 수영이 상경한다.
2. 동생, 이하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시바리가 되나, 도중에 문희의 상황을 알아차린다.
3. 문희를 돕기 위해 내림굿을 받다가 어중간한 선무당이 된다.
4. 모든 진실을 깨닫고 발쩌에서 수영과 문희, 나와 석호는 바리의 자리와 무당신선의 자격을 두고 싸움을 벌인다.
5. 나는 차안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렇다.
즉 주인공은 괴담의 경계가 아닌 괴담의 안쪽에 발을 들임으로서 괴담이 아닌 장르소설로서 바리전쟁은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괴담문학이 아닌 일반 장르문학으로서의 바리전쟁은 정말 탄탄하다.
최대한 군더더기 없는 구성을 만들려 쓸때 없는 인물 등장을 가급적 줄이고 최소한의 인물만을 배치한 점과 더불어,
깊이 있는 무속에 대한 이해가 배어있어 이러한 장치와 소재의 재구성이 한편 바리전쟁과 비슷한 글을 준비중인 글쓴이로 하여금 기염을 토하게 한다.
장르적 재미로서 낯익음을 낯설게하고,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렇기에 아쉬운 점이 더욱 묻어날 수 밖에 없는 수작이다.
피안과 차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보여주기에 앞서 결국 괴담으로의 색체를 기대한 독자의 관심은 빛바래고,
장르적 장치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당-바리의 이야기가 각색되고 가감 된 면도 없잖아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 발쩌라고 하는 하나의 굿판은 크게 (드래그 요망)
1. 무장신선과 바리의 자격에 대한 싸움.
2. 강신무, 세습무, 학습무의 세대 주도권을을 건 백년지기 싸움.
3. 운명에 대한 싸움.
으로 기능한다.
운명과 숙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만, '나'와 '석호'의 대립은 '석호'라는 인물의 입장을 '나'와 대칭으로 놓기에는 무리수가 있었고, 전체적인 플롯이 이 발쩌에 대한 복선으로 향하나 이것이 운명에 대한 대립으로 나뉜다 볼 수 있기에 소설 전반에 흐르는 무속을 통한 소재에서 아우른 피안과 차안의 경계. 색체마저 바랜 느낌이 없잖아 남는다.
특히 바리 서사무가에 대한 변주는 꽤 큰 편이다.
바리공주 설화는 이야기 자체를 한켠에 냅두고서라도, 결국 무권과 왕권을 나누어 피안과 차안의 균형을 맞춘다는 걸 중점으로 파악가능 한 서사무가이다.
허나 작품 내에서 바리는 무속의 신으로서 강신무와 세습무 학습무 중 앞으로 100년을 어느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를 판가름하는데, 이러한 세습무 강신무등은 학문 서술적 구분으로 명확히는 이러한 구분이 모호한 구석이 없잖아 있을 뿐더러 이러한 싸움으로 하여 작품 내에서 얼핏 보여주는 사제, 인간으로서의 무당은 죽어버린다.
거기다 발쩌를 통해 피안과 차안의 구분또한 모호해져버린다.
작품 외의 이야기로 바리 서사무가 외에도 부도지를 빌자면, 오미의 변 이후 오금이 흙이 되어버린 이후, 하늘의 소리를 직접 듣기 위한 지혜로운 아낙네들이 생겨나는데 이것을 들어 무당의 시초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재미난 이야기가 자칫 장르적 소재적 재미에 급급한 것인가하는 우려가 들어 아쉬움을 금할 데가 없다.
특히 피안이나 차안등은 불교적 용어로 엄연한 순수한 의미의 무속과는 거리가 있다.
결과적으로 바리전쟁은 플롯으로는 일치성을 가지려하지만, 초반과 후반의 갭이 커진 작품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소재적 차용이 장르적 재미를 위해 가감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부뚜막이 없으면, 냉장고를 조왕으로 삼자.
우물이 없으면, 수도관을 용왕신으로 삼자.
수문장이 없으면 대문의 초인종을 수문장신으로 삼자.
뒷간이 없으면 화장실을 측간으로 삼자.
안방에 삼신,
앨범과 족보 책에 조상신.
온가족이 모두 모여 바라보는 커다란 텔레비전을 성주로 삼자.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해도.
귀신이 꼭 죽어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니까.
믿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에든 귀신은 깃들 수 있으니까.
마치며.
귀담은 어디에든 산재해있다.
무속은 신이 아닌 인간의 편에서 기능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모든 여행은 결국 지금의 현실에 다시 되돌아와만 끝맺는다.
바리전쟁은 잘짜여진 한편의 장르적 소설이기에 이 이야기를 모두 즐긴 독자로서 여행에 아쉬움이 남는다.
좀 더 남고 싶은 것이다. 피안과 차안의 경계에서서 이 작은 세상을 둘러보고 싶은지 모른다.
모든 환상은 유치하다. 그러나 유치하다고 비웃는 자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다.
"이게와 저게, 두 세상 하나로 통허게 하소사."
모두가 귀신을 보는 사회. 혹 모두가 귀신을 보지 못하는,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
바리전쟁을 읽은 독자는 작품의 여운과 함께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결국 당신께서 바라신 환상은 무엇이시렸는지.
그럴 때에, 이 괴담이 아닌 괴담문학이 신 괴담문학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당신의 바리는 어느 한편에선가 당신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간만에 돈 아깝지 않은 좋은 작품을 읽게 해준 작가 진산에게 감사한다.
참고로 빨리 읽고 싶어서 총판에서 사는 탓에 작가 사인본 못 받았다. 나중에 사인회 열어라.
그럼, 이만 바리전쟁이었다.
'무지개 끝에 보물은 없다.
외계인은 없다
마녀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딱 한 가지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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