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음에 둔 사람과 교제란 걸 해 보고 싶어요" - 제중원 라디오 원고
2010.03.11 00:17 Edit
요새 꿀단지가 본방 사수하는 바람에 덩달아 자주 보게 되는 SBS '제중원'
꿀단지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잘 안 나온다는 징크스를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 '대장금' 본 사람들에겐 별로 재미없을 거라고 하는데, 난 '대장금'을 안 봤으므로 그 점에 대해선 패스. '대장금'이 만들어냈다는 퓨전 사극의 요소 -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노력하는 비주류 인생의 발굴, 끊임없는 대결 구도, 다채로운 조연 - 등을 충실히 구현한 점에서도 기본적 재미는 있다.
하지만 난 수백, 수천년을 내려온 구래의 신분제 속에 살다 근대적 세계관에 맞딱뜨려 놀라고, 당혹해 하며, 변화해 가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 점에 더 눈이 간다.
#1. 백정 신분을 숨기고 있는 황정 의생(박용우)과 부유한 역관 집안 출신의 의녀 석란(한혜진)이 본격적으로 가까와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황의생이 석란에게 손을 내밀며 한 말 "악수 하시렵니까?" - 신분제의 지배 하에 살던 두 사람이 남녀의 차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 자유로운 인격체로서의 한 남자와 여자로 만나는 첫 순간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다.
#2. 신분의 벽과 도망자 죄인이란 사정 때문에 소극적이던 황정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며 석란에게 청혼한다. 서양식 청혼법이다. 석란은 손을 내밀어 청혼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떨리는 포옹을 나눈다.
서양 풍습의 추종이라 볼 수도 있지만, 이 장면 앞에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제중원 주변 사람들이 한담을 하다가 서양의 결혼 풍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서양인들은 청혼할 때 남자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네며 결혼을 청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남자가 "그렇게 굴욕적으로 하면서까지 뭣하러 결혼하냐?"고 말한다. 황의생은 석란에게 청혼하며, 여자 위에 군림하던 전근대적 인간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근대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후 석란은 아버지에게 백의생과 결혼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며 "마음에 둔 사람이 있고, 그와 교제란 걸 해 보고 싶다"고 말한다. 데이트의 탄생! 역관으로 외국물을 많이 먹은 그의 아버지(김갑수)는 교제를 허락한다. 아무리 깨인 인물이라 해도 당시의 중년 남성이 이렇게 선선히 승락한다는 것은 좀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아버지마저 이들의 교제를 반대하면 감당 못 할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며 드라마가 산으로 갈테니 일단 패스.
어쨌든 제중원은 근대적 인간의 탄생 과정을 정제된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뭐랄까 상당히 신기하다. 이런 내용도 드라마에 담을 수 있구나 하는.. 그러니 시청률 좀.. 이 기사 제목이 너무 와 닿는다. "'제중원' 황정 석란 사랑 너무 아름다와 시청률이 슬프구나"
근데 황의생의 사랑과 의학의 라이벌로 나오는 백도양 의생(연정훈)이 너무 불쌍하다.
지체 높은 양반인 그는 일찍부터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져 스스로 중인들의 일인 의학에 투신한 인물. "지체 높은 양반은 남을 섬기는 의원에 적합하지 않기에 당신을 의학 조수로 쓰지 않겠다"는 제중원 헤론 원장의 말에 스스로 상투를 잘라 버리는, 나름 깨어 있고 똑똑하고 결기도 있는 인물.
그가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제중원에서 공부하는 것은 첫째 '조선 최초의 양의가 되고 싶어서'이고 둘째 '석란과의 사랑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1등한 의생에게 단독 진찰 자격을 주는 의학 시험에서 황의생에게 장원을 빼앗기고 (게다가 겨우 4등!), 석란은 백의생의 청혼을 거절하고 황의생과 '교제'를 시작하는 등 요새 풀리는 일이 없다. 더구나 제중원에 대한 정부의 감사가 실시되면서 과거 제중원 입사 시험 당시 제중원 관리직원들이 황의생과 백의생의 시험지를 바꿔치기 해 백의생이 합격했었다는 사실도 드러나는 등 망신.
왠지 주인공보다 백의생의 좌절과 낙담에 더 감정이입 되고 말았다.. 아, 백의생..
하지만 괜찮아... 너에게는 한가인이 있잖아..
the Road Less Traveled 
너에게는 한가인이..ㅎㅎ